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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

주요묘역·시설물

주요묘역·시설물

무후선열제단

장병묘역은 총 53개의 묘역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대령 이하의 장교, 사병, 군무원 등이 안장되어 있다.
실제 56개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나 그 가운데 5번, 8번, 9번 묘역과 7번 묘역에 주로 경찰관이 안장되어 있어 이를 경찰관 묘역으로 구분하고 나머지 53개 묘역을 장병묘역으로 설명하고 있다.
6·25전쟁 이전 무장공비 및 빨치산 토벌, 여순사건 전사자 등과 6·25전쟁 전사자, 월남전쟁 전사자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최초 안장자는 1957년 4월 2일 11번 묘역에 안장된 육군 하사 강덕수 등 184위 이다.
이 묘역에는 6·25전쟁 영웅인 백마고지 3총사, 월남전쟁 파병훈련 중 부하를 구하고 순직한 강재구 소령, 재일학도의용군 출신으로 공군 조종사가 된 박두원 대위, 낙하훈련 중 부하를 구한 이원등 상사, 아버지 박명렬 소령과 같은 곳에 안장된 박인철 대위, 국립묘지 묘비 중 유일하게 이름 없는 묘비(김수영 육군 소위), 종군기자로 월남전쟁에서 사망한 유일한 한국인 기자인 백광남 기자, 6·25전쟁 당시 미군 24사단장 월리엄 F.딘 장군 구출작전에 자원했다가 순직한 철도기관사 김재현, 육탄 10용사 등이 안장되어 있다.

백마고지 전투(13번 묘역)

백마고지 전투(13번 묘역)

1952년 10월 철의 삼각지인 백마고지 전투시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30연대 1중대의 공격이 중단되었다.

이때 1소대의 오규봉 상병은 적 자동화기 진지를 폭파하기 위하여 대공포 판을 등에 메고 적 자동화기 진지로 돌진하였으며 소대장 강승우 소위와 안영권 일병은 화력으로 엄호사격을 하였다.

이 순간 소대장 강승우 소위가 티엔티와 박격포탄으로 적 특화점 공격을 결심, 기관총 진지의 7m까지 포복으로 전진 폭발물을 투척하려는 순간, 우측 팔에 총상을 입고 떨어뜨린 것을 안영권 일병이 잽싸게 주워 투척하고 오규봉 상병도 수류탄을 투척하여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고 산화함으로서 중대가 공격을 재개하여 목표를 탈환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들의 용감한 군인정신은 25회에 걸쳐 뺏고 빼앗기는 격전을 치른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종결하는데 결정적인 공훈을 세웠으며 강승우 소위, 안영권 일병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위패로 봉안되어 있으며, 오규봉 상병은 서울현충원 제13묘역 (35317호)묘에 안장되어 있다.

강재구 소령(51번 묘역)

강재구 소령(51번 묘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호국의 간성으로 각급 부대의 작전장교, 중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국군이 월남에 파병되자 1965년 8월 31일 파월 맹호부대에 지원하였다.

맹호부대 1연대 3대대 10중대장으로 보직되어 1965년 10월 4일 파월에 앞서 중대원들과 함께 실전훈련을 하는 도중 한 병사가 수류탄을 잘못 투척하는 실수를 범해 전 중대원이 위험에 처하자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부하들을 구하고 자신은 장렬히 산화하였다.
자신의 한 목숨을 희생하여 수십명 부하의 생명을 구하고, 희생정신의 귀감이 된 강재구 소령은 제 51묘역 2호 묘에 안장되어 있다.

박두원 대위(17번 묘역)

박두원 대위(17번 묘역)

1926년 7월 경북 경주 출생으로 일본 사가중학교와 비행학교를 졸업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자원입대하여 학도병으로 지상전투에 참가하던 중, 공군에 조종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공군 전투조종사로써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되었다.

공군에 편입된 박대위는 1952년 3월 공군소위로 임관하여 공군최초의 비행단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던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에 배속되어 F-15무스탕 전폭기의 조종간을 잡게 되었다. 이후 5개월간 89회라는 경이적인 출격을 감행한 박대위는 원산, 고성, 간성, 신안주 등지에서 최우수 조종사로서 무수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1952년 8월 2일 89회째 출격하던 날, 기상악화로 계획된 고도를 취하지 못하고 속초상공을 지나던 중 적의 대공포화를 맞아 장렬히 산화하고 말았다.

전투 조종사가 되면서부터 평소에 최소한 100회의 출격을 희망했던 박 대위가 목표를 눈앞에 두고 89회를 마지막으로 산화하자, 동료 조종사들은 다음날부터 그의 영정을 들고 교대로 출격하여 100회의 출격기록을 세워주는 눈물겨운 전우애를 발휘했다. 박두원 공군 대위는 국립서울현충원 제 17번 묘역에 안장되어 있으며 재일학도의용군 출신으로서 재일학도의용군 전몰용사 위령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원등 상사(53번 묘역)

이원등 상사(53번 묘역)

이원등 상사는 1966년 2월 4일 6명의 대원을 이끌고 한강 상공에서 고공낙하 훈련을 지도하던 중 4,500피트 상공에서 대원을 차례로 낙하시키고 자신도 뛰어 내렸다. 시속 150마일로 하강하고 있는 시야에는 낙하산을 펴지 못하고 데굴데굴 구르며 더 빠른 속도로 낙하되는 김병만 중사가 보였다.

이원등 상사는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선이동 방법으로 접근하여 김병만 중사의 낙하산을 펴 주어 그의 생명을 구한 후, 자신은 낙하산을 펼칠 기회를 잃어 버리고 결빙된 한강 위에 추락, 순직하여 전우애의 귀감이 되었으며 제53묘역 30531호에 안장되어 있다. 교관으로서 훈련생의 안전을 지킨 전우애를 기리기 위해 추락지점인 한강 노들섬(중지도)에 이원등 상사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부자의 묘(박영렬 소령, 박인철 대위 / 29번 묘역)

부자의 묘(박영렬 소령, 박인철 대위 / 29번 묘역)

故공군소령 박명렬(父) : 29묘역 3305호
故공군대위 박인철(子) : 29묘역 3557호
조국의 하늘을 지키기 위해 부자(제17전투비행단 故공군소령 박명렬(父, 31세), 제20전투비행단 故 공군대위 박인철 (子, 27세))가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장교로 임관 후 오직 호국의 일념으로 근무하다가 사랑하는 가족을 남기고 순직하여 이곳에 함께 잠들어 있다.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아버지(故 소령 박명렬)는 1978년 3월 28일에 공군소위(공사 26기)로 임관하였고, 서울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은 아들(故 대위 박인철)은 2004년 3월 17일 공군소위(공사 52기)로 임관하였다.
부자(父子)는 각각 제17전투비행단과 제20전투비행단 소속의 전투기 조종사로서 각종 훈련에 참가하여 타의 모범이 되는 장래가 촉망되는 장교였다. 아버지는 교육 성적이 우수하여 공군 최고 학부인 공군대학총장으로부터 상장을 수상한 뛰어난 인재였으나 안타깝게도 1984년 3월 14일 충북청원에서 팀스피리트 훈련에 참가했다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31세의 나이에 순직하고, 그의 아들마저도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2007년 7월 20일 전투기 조종사로서 야간 요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태안반도 서북쪽 해상으로 추락하여 순직(보국훈장 광복장 추서)하였다.
정부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부자(父子)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국민들의 귀감이 되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는 1984년 3월 16일 현충원 묘역에 모셨으며, 아쉽게도 아들은 순직당시 발견되지 않아 비행 전 남겨둔 유품을 2007년 7월 23일 가족들의 청원에 따라 아버지 곁에 안장함으로써 부자(父子)가 함께 영면할 수 있게 되었다.

형제의 묘(30번 묘역)

형제의 묘(30번 묘역)

故하 사 이만우(兄, 22세) : 30묘역 26549호
故이등중사 이천우(弟, 19세) : 30묘역 39591호
6ㆍ25 전쟁 당시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사랑하는 홀어머니를 뒤로한 채 각각 정든 고향집을 떠났던 두 형제가 전사한 지 60년 만에 다시 만나 이곳에 함께 잠들어 있다.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이들 형제는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형님(故 하사 이만우)이 입대한 지 한 달 만에 당시 18세이던 동생(故 이등중사 이천우) 또한 형님의 뒤를 이어 자원입대하였다.
각각 1사단과 7사단 소속으로 서울 수복작전에 이어 북진의 선봉에 서서 평양탈환작전 등 주요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무공을 세운 형제는 안타깝게도 이듬해인 1951년 5월 7일 고양지구전투에서 형님이 전사(화랑무공훈장 수훈)하고 같은 해 9월 25일 동생마저 19세 꽃다운 나이에 강원도 양구의 백석산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화랑무공훈장 2회 수여)하였고, 1년 남짓 참전기간 중 이들이 군화신고 걸었던 장정은 9천리, 3,400km에 달했다.
다행히도 형님은 1960년 5월 이 곳 현충원 묘역에 모셔졌으나, 아쉽게도 동생은 당시 긴박했던 전투상황에서 미처 수습되지 못한 채 긴 세월을 이름 모를 들꽃과 함께 전투현장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2010년 10월 뒤늦게나마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동생의 유해가 발굴되어 신원이 확인되고 형님 곁에 안장됨으로써 비로소 함께 형제애를 나누며 영면할수 있게 되었다. 3개의 화랑무공훈장에 빛나는 호국용사 故 이만우, 이천우 형제!님들의 고귀한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으며 나라사랑의 표상으로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름없는 묘(육군 소위 김○○의 묘 / 54번 묘역)

이름없는 묘(육군 소위 김○○의 묘 / 54번 묘역)

6·25전쟁 초기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낙동강 방어선 경북 안강지구 도음산 전투에서 전사(1950.8.27.) 어는 소대장(김 소위라는 것만 알고 있음)의 시신을 같이 전투에 참가했던 다른 부대의 한 소대장 (황규만)이 치열한 전투로 인해 급한 대로 능선 후사면 소나무 밑에 가매장 한 후 후일을 위해 돌로 표시를 하여 두고 다시 전투를 계속했다.
전쟁은 끝나고 14년 뒤, 살아남은 황 소대장은 대령이 되어 1군사령부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면서 그동안 잊지 못했던 이 전우의 시신을 찾기 위해 그 장소로 가 오랜 기억을 더듬으며 헤맨 끝에 시신을 발굴했다.

그러나 이름을 알 수 없어 국립묘지 안장을 할 수 없자 고민 끝에 육군참모 총장에게 이 사실을 청원, 승인을 받아 1964년 5월 29일 이름도 없이 국립묘지 제54묘역 1659호에 안장하였다.
그 후 황규만 장군은 1976년 예편(예비역 준장 : 육사10기) 하여 직장업무 등으로 분주한 생활을 하면서도 김 소위의 신원 확인을 위해 계속 노력한 끝에 1990년 11월 드디어 이름과 가족을 찾아냈다.
육군소위 김 수영( 金 壽泳갑종1기생, 강원도 춘천시 소양로에 아들 김종태 등 가족 거주. 그러나 전쟁의 아픔과 이런 비극적 사연을 간직한 역사적 산물로 남겨두기 위해 이름 없는 이 묘비는 그대로 두고 추모비에만 이름을 새겨 두어 국립묘지 묘비 중 유일하게 이름이 없는 묘이다.

백광남 기자(51번 묘역)

백광남 기자(51번 묘역)

1960년 4월 동아일보에 입사 1966년 10월 14일 월남전을 취재하기 위해 고국을 떠났던 백광남 기자는 1966년 11월 27년 월남 디안에서 국군 비둘기부대를 방문 취재하고 수도 사이곤(현 호치민시)을 향하여 모터사이클로 단신 귀환도중 적군 출몰이 심한 작전지구에서 순직하였는데 한국인 기자로는 최초이고 유일한 순직이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전장터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생생한 전황 보도를 위한 취재활동을 하다 사망하여 기자정신에 투철한 언론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유해는 1966년 12월 5일 동아일보사장으로 안장식을 치른 후 제 51묘역에 안장되었다.

김재현 철도기관사(7번 묘역)

김재현 철도기관사(7번 묘역)

1950년 7월 19년 대전방어작전에 투입되어 최후까지 대전 사수를 진두지휘하다 실종된 미 제24사단장 「윌리엄 F.딘」장군을 구출하기 위해 미군특공대를 수송하는 구출수송 증기기관차 기관사로 위험을 무릅쓰고 자원, 적진에서 임무를 수행하다 대전 남방 4㎞ 지점인 세천 터널 부근에서 핸들을 잡은 채 적의 총탄을 맞고 순직하였다.

철도청에서는 그 지점에 순직비를 세워 추모하고 있으며 철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국립묘지에 안장(제7묘역 5판)되었다.

육탄 10용사(6번 묘역)

육탄 10용사(6번 묘역)

이 묘역에는 남과 북이 38선을 경계로 대치된 상황에서 1949년 5월 4일 북한공산군에게 불법 점령당한 개성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포탄을 안은 채 적진지에 뛰어들어 진지를 분쇄하고 산화한 10명의 용사가 잠들어 있다.

육탄 10용사는 서부덕 소위, 김종해, 윤승원, 이희복, 박평서, 황금재, 양용순, 윤옥춘, 오제룡, 박창근 상사를 일컫는 말로 6번 묘역 맨 앞줄에 안장되어 있다.

이들 육탄 10용사의 명복을 빌며 위훈을 추모하고 그 뜻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육탄10용사 현충비’가 세워져 있다.

이상득 하사(26번 묘역)

이상득 하사(26번 묘역)

1967년 3월 8일 백마 28연대가 월남 투이호아 지역에서 오작교 1호 작전을 전개할 때 11중대 최초 목표인 “락미” 마을을 탐색, 적을 색출 소탕하던 중 3소대의 우측으로 진출하던 2분대는 나무숲에 둘러싸인 독립가옥을 수색 할 때 가옥지하에 설치된 10명 정도 수용이 가능한 토관을 발견하고 분대장 이하 4명이 진입하여 수색하던 중, 선두로 들어간 부분대장 이상득 병장은 아군을 향하여 수류탄을 투척하는 베트공을 목격하였으나 분대원들이 밖으로 뛰어나가 수류탄을 피하거나 수류탄을 되받아 투척할 여유가 없는 긴박한 순간임을 판단하고, 이병장은 “수류탄이다”라고 소리치면서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3명의 생명을 구하고 장렬하게 산화하였다.

전우애의 귀감이 된 이상득 병장은 하사로 추서되어 제26묘역(708호)묘에 안장되어 있다.

양병수 상사(6번 묘역)

양병수 상사(6번 묘역)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수도 서울을 되찾은 1950년 9월 28일 수복 당시 적 잔당들의 발악하는 총탄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중앙청 청사에 제일 먼저 태극기를 게양하는 군인의 용맹을 떨쳐 감투정신의 귀감이 되었다.

1979년 7월 3일 사망하여 7번 묘역 1-64호(구 서쪽 6호)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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