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며 3・1운동의 시위 대열에 참가했다가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같은 해 8월 보석으로 출감한 김재근은 평소 잘 알고 지냈던 권인채(權仁采)로부터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취지와 목적을 듣고 가입하였다.
대한독립애국단은 1919년 5월 신현구(申鉉九)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중국 상해에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단체였으며,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의 선전과 재정자금 조달 및 국내 조직망을 통한 임시정부 연통부(聯通府)의 역할 등을 주로 담당했다.
1919년 8월 9일 강원도 철원으로 내려가 박연서(朴淵瑞)・강대려(姜大呂)・김철회(金喆會)・박건병(朴健秉) 등과 함께 대한독립애국단의 취지와 목적을 알리고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을 조직하도록 했다.
그리고 박연서(朴淵瑞)에게 서울의 본부와 연결되도록 소개장을 써주는 한 편, 철원애국단을 발판으로 강원도 지역에서 조직적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1920년 1월말 강원도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체포되어 1921년 3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감옥을 나온 후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1928년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교직생활을 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고등만몽학교(高等滿蒙學校)를 다녔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일화ㆍ어록
......독립만세 또는 만세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독립이 된 것으로 생각했다....... 경찰관도 최초에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보고만 있었으므로 독립했다고 생각했다. 하여튼 나는 독립선언이 있었으므로 독립했다고 생각했고, 또 군중은 기쁨에 넘쳐 만세를 불렀다. - 「김상덕 신문조서」, 경성지방법원, 1919년 4월 8일(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5,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