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묘역은 6⦁25 전쟁 전후 및 70년대 전사자와 순직자를 모시기 위해 조성된 묘역으로 총834여위가 안장되어 있다.
연도 | 계 | '50년 이전 | 6・25전쟁중 | '54~'59 | ‘60~’69 | ‘70~’79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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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834 | 14 | 268 | 108 | 6 | 431 | 7 |
안장 | 834 | - | - | 347 | - | 487 | - |
미국 8군의 공산군 공세에 대한 제한된 공격작전의 일환으로 저격능선을 공격하게 된 대한민국 2사단 제17연대, 제31연대, 제32연대와 배속된 제30연대, 제37연대가 16개 포병 대대의 포격 지원 아래 1952년 10월 14일 5시 정각에 공격을 개시하여 중국 인민해방군 7개 연대(제133연대, 제143연대, 제135연대, 제86연대, 제1387연대, 제92연대, 제106연대)가 11월 24일까지 6주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진지를 사수했다.
저격능선 전투(狙擊稜綫戰鬪, 영어: Battle of Sniper ridge)는 한국 전쟁이 고지전으로 변하여 교착되었던 1952년에 중부전선의 김화(현재의 철원군 김화읍 주변)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대한민국 2보병사단이 중공군 15 군에 맞서, 주저항선 전방의 전초진지를 빼앗기 위한 공방전을 벌인 지역으로 김화 북방 7Km지점에 위치한 저격능선으로서 철의 삼각지대 중심부에 자리잡은 오성산에서 우단의 김화지역으로 뻗어내린 여러 능선 가운데 남대천 부근에 솟아오른 돌출된 능선이다. 그 해발고도는 590m정도이고 능선의 크기는 1㎢정도의 장방형 능선이다.
저격능선이란 이름은 1951년 10월. 당시 노매드(Nomad)선을 목표로 진격작전을 전개한 미국 25 보병 사단이 김화지역으로 진출하여 중공군 2군과 대치할 때 중공군이 538고지로 진출한 미군을 저격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고 미군 병사들은 이 무명능선을 가리켜 스나이퍼 리지'라 불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1949년 5월 4일,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각에 북한군의 기습작전으로 점령된 개성 부근 송악산을 탈환하려고 공격을 개시한 1사단 11연대는 수적 열세와 적의 토치카에서 맹렬히 쏘아대는 기관총 사격 때문에 많은 희생을 내고 7~8부 능선에서 공격이 좌절되고 말았다. 전투를 수세에서 공세로 뒤바꾸고 고지를 점령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특공대를 편성해 적의 토치카를 파괴하는 것밖에 없었다.
이 소식이 병사들에게 전해지자 제일 먼저 손을 들고 지원한 병사는 부사관 서부덕 상사였으며, 이어 김종해 상병 등 나머지 인원이 지원해 특공대가 편성되었다. 오후 1시 30분, 특공대는 각자 81미리 박격포탄에 수류탄을 장치한 특제폭탄을 가슴에 안고 개인별로 정해진 목표를 향해 약진했다.
오후 2시 정각. 아군의 모든 지원사격이 중지된 후 서상사는 박격포탄을 안고 단독으로 돌진하여 적 토치카를 향해 힘껏 던졌다. “꽝”하는 굉음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나머지 특공대원들도 적의 포화를 뚫고 각자 맡은 목표까지 가는 동안 적탄에 다리와 팔 등에 관통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적 토치카를 육탄공격하여 조국의 수호신으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때를 놓치지 않고 사기 충천한 아군의 돌격으로 마침내 고지를 탈환했다. 또한 적 사살 137명, 기관총 등 114정의 무기를 노획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정부는 이들을 ‘육탄10용사’로 명명하고 이들의 조국애와 희생정신을 기려 서상사는 소위로 나머지 9명은 상사로 특진시키는 동시에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고 이곳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이슬같이 죽겠노라”고 다짐했던 이들이야말로 군인으로서 충성의 극치를 보여준 표상이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