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 묘역은 창군 이래 여수·순천사건, 6·25전쟁, 대가첩작전, 베트남(월남)전쟁 등에서 한 몸을 바쳐 싸우다 산화한 분들이 안장된 곳이며, 국립서울현충원의 묘역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곳에는 사병(부사관 포함), 대령 이하 장교, 군무원 및 종군자, 재일학도의용군, 파월장병, 육탄10용사 등 총 5만 2,936위가 안장되어 있다. (2020년 12월 말 기준)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실제로 총 56곳의 장병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나 그 가운데 5번, 8번, 9번 묘역(7번 묘역 일부)에 주로 경찰관이 안장되어 있어 이를 경찰관 묘역으로 구분하고, 나머지 53개 묘역을 장병 묘역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6·25전쟁 이전의 무장공비 및 빨치산 토벌 작전이나 여순사건 때 전사자와 6·25전쟁 전사자, 베트남(월남)전쟁 참전 전사자 등이 장병 묘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최초 안장자는 1957년 4월 2일 11번 묘역에 안장된 육군 하사 강덕수 등 192위이다.
이곳 장병 묘역에는 6·25전쟁 영웅인 백마고지 3총사 중 1인 오규봉 하사, 월남전쟁 파병 훈련 도중에 부하를 구하고 순직한 강재구 소령, 재일학도의용군 출신으로 공군 조종사가 된 박두원 대위, 낙하훈련 중 부하를 구한 이원등 상사, 아버지 박명렬 소령과 같은 곳에 안장된 박인철 소령, 60년 만에 동생의 유해가 발견되어 형제가 나란히 안장된 이만우 하사와 이천우 이등중사, 국립묘지 가운데 유일하게 이름 없는 묘비(김수영 육군 소위, 이후 호국전우의 묘), 종군기자로 베트남(월남)전쟁에서 사망한 유일한 한국인 기자 백광남, 베트남(월남) 전쟁 영웅으로서 죽어서도 베트남(월남)전 참전 전우들과 함께하겠다는 유언에 따라 사병 묘역에 안장된 채명신 장군, 서부덕 소위를 비롯한 육탄 10용사 등이 안장되어 있다.
한편 국립서울현충원은 장병 묘역 안장자 대부분이 6·25전쟁 전사자로서 갈수록 유가족의 발길이 뜸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를 해결하고자 '묘역 헌화 활동'을 통해 호국영령들의 위훈을 추모하는 후손된 도리를 다하고 있다.
육군상병 오규봉의 묘 (백마고지 3총사 중 1인/13번 묘역)
1952년 10월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을 뚫고 철의 삼각지인 백마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전개된 전투에서 적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고 전사한 강승우 소위, 안영권 일병, 오규봉 일병을 백마고지 3총사로 일컫는다. 이들의 영웅적인 전과는 총 25회에 걸쳐 뺏고 뺏기는 치열한 격전을 치른 백마고지를 지킬 수 있도록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강승우 소위와 안영권 일병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위패로 봉안되어 있으며, 오규봉 일병은 국립서울현충원 13묘역 2판 35317번에 안장되어 있다.
육군소령 강재구의 묘 (51번 묘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호국의 간성으로 각급 부대의 작전장교, 중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국군이 베트남(월남)에 파병되자 1965년 8월 31일 파월 맹호부대에 지원하였다.
맹호부대 1연대 3대대 10중대장으로 보직되어 1965년 10월 4일 파월에 앞서 중대원들과 함께 실전훈련을 하는 도중 한 병사가 수류탄을 잘못 투척하는 실수를 범해 전 중대원이 위험에 처하자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부하들을 구하고 자신은 장렬히 산화하였다. 자신의 한 목숨을 희생하여 수십명 부하의 생명을 구하고, 희생정신의 귀감이 된 강재구 소령은 제 51묘역 2호 묘에 안장되어 있다.
공군대위 박두원의 묘 (17번 묘역)
1926년 7월 경북 경주 출생으로 일본 사가중학교와 비행학교를 졸업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자원입대하여 학도병으로 지상전투에 참가하던 중, 공군에 조종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공군 전투조종사로서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되었다.
공군에 편입된 박대위는 1952년 3월 공군소위로 임관하여 공군최초의 비행단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던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에 배속되어 F-51 무스탕 (Mustang) 전폭기의 조종간을 잡게 되었다. 이후 5개월간 89회라는 경이적인 출격을 감행한 박대위는 원산, 고성, 간성, 신안주 등지에서 최우수 조종사로서 무수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1952년 8월 2일 89회째 출격하던 날, 기상악화로 계획된 고도를 취하지 못하고 속초상공을 지나던 중 적의 대공포화를 맞아 장렬히 산화하고 말았다.
전투 조종사가 되면서부터 평소에 최소한 100회의 출격을 희망했던 박 대위가 목표를 눈앞에 두고 89회를 마지막으로 산화하자, 동료 조종사들은 다음날부터 그의 영정을 들고 교대로 출격하여 100회의 출격기록을 세워주는 눈물겨운 전우애를 발휘했다. 박두원 공군 대위는 국립서울현충원 제 17번 묘역에 안장되어 있으며 재일학도의용군 출신으로서 재일학도의용군 전몰용사 위령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육군상사 이원등의 묘 (53번 묘역)
이원등 상사는 1966년 2월 4일 6명의 대원을 이끌고 한강 상공에서 고공낙하 훈련을 지도하던 중 4,500피트 상공에서 대원을 차례로 낙하시키고 자신도 뛰어 내렸다. 이 상사는 먼저 뛰어내렸으나 낙하산을 펴지 못하고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김병만 중사를 보자 곧바로 사선이동 방법으로 접근하여 김 중사의 낙하산을 펴 주었다. 그러나 자신은 낙하산 펼칠 기회를 놓치고 결빙된 한강으로 추락, 순직하였다.
교관으로서 훈련생의 안전에 최선을 다해 전우애의 귀감이 된 이원등 상사를 기리기 위해 추락 지점인 한강 노들섬(중지도)에 동상을 건립하였고 그는 국립서울현충원 제 53번 묘역 4판 30531번에 안장되어 있다.
호국부자의 묘 (공군소령 박명렬의 묘, 공군소령 박인철의 묘 / 29번 묘역)
故공군소령 박명렬(父) : 29묘역 3305호
故공군소령 박인철(子) : 29묘역 3557호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이 시작된 이래 부자(父子)가 안장된 최초의 묘가 있다. 故 박명렬(공사 26기)소령과 故 박인철 대위(공사 52기)가 그 주인공이다. 박명렬 소령은 1984년 팀 스피리트 훈련 중 F-4E 전투기를 조종, 급강하 후 급상승하는 훈련 중 지상에 충돌하는 사고로 산화함으로써 국립서울현충원 제29번 묘역 3305번에 안장되었다.
박인철 대위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면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원망이 교차하는 삶을 살았다. 고등학생이 되자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빨간 마후라'에 대한 동경으로 변해가고, 결국 전투기 조종사의 꿈으로 이어졌다.
그러한 꿈은 어머니와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다. 하지만 수많은 갈등과 고민 끝에 내린 '아버지를 이어 조국의 하늘을 지켜야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어머니와 할머니는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정식으로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그는 공군 20전비 121대대 전투조종사로서 2007년 7월 20일 KF-16전투기를 몰고 야간비행 임무를 수행하던 중 태안반도 서북쪽 해상에서 추락하여 순직하였다. 국립서울현충원은 그를 29번 묘역에 있는 아버지 박명렬 소령의 묘비 옆에 나란히 안장(29묘역 3557번)하였다. 이는 1955년 국립서울현충원이 조성된 이래 부자가 나란히 안장된 최초의 경우이다.
호국형제의 묘 (육군하사 이만우의 묘, 육군이등중사 이천우의 묘 / 30번 묘역)
故하 사 이만우(兄, 22세) : 30묘역 26549호
故이등중사 이천우(弟, 19세) : 30묘역 39591호
6ㆍ25 전쟁 당시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사랑하는 홀어머니를 뒤로한 채 각각 정든 고향집을 떠났던 두 형제가 전사한 지 60년 만에 다시 만나 이곳에 함께 잠들어 있다.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이들 형제는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형님(故 하사 이만우)이 입대한 지 한 달 만에 당시 18세이던 동생(故 이등중사 이천우) 또한 형님의 뒤를 이어 자원입대하였다. 각각 1사단과 7사단 소속으로 서울 수복작전, 평양탈환작전 등 주요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듬해인 1951년 5월 7일 고양지구 전투에서 형이 전사하고 같은 해 9월 25일 동생마저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강원도 양구 백석산 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하였다.
형 이만우 하사는 1960년 현충원 묘역에 모셔졌으나 동생 이천우 이등중사는 유해가 수습되지 못한 채 전투 현장에 홀로 남겨졌다가 2010년 뒤늦게 유해가 발굴되어 이듬해 6월 6일 제 30번 묘역의 형님 곁에 나란히 안장됨으로써 60년 만에 형제애를 나누며 영면할 수 있게 되었다.
호국전우의 묘 (육군 소위 김○○의 묘, 육군 준장 황규만의 묘 / 54번 묘역)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장병의 묘 가운데 특이하게도 이름이 없는 묘비가 하나 있다. 이 묘비의 주인공은 육군 소위 김수영이다.
6·25전쟁 초기 낙동강 방어선 경북 안강지구 전투에서 적에게 빼앗긴 경북 월성군 도음산 384고지의 탈환 임무를 띠고 전투를 수행하던 황규만 소대장에게 지원을 왔던 김수영 소대장은 본인을 “제1연대에서 온 갑종간부 1기생 김 소위”라고 소개하였다. 총알이 빗발치는 치열한 전투중 능선 위 1백여 m 거리에서 김소위는 적들의 기관총에 전사하였고, 황 소위는 신원을 알 수 없는 김 소위의 시신을 근처 소나무 밑에 가매장 하였다.
6·25전쟁이 끝나고 세월이 흐른 뒤 1군사령부 비서실장으로 보임한 황규만 대령은 평소 잊지 않고 있던 김 소위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가매장 지역을 헤맨 끝에 시신을 발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 소위라고만 알 뿐 정확한 성명을 알 수 없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할 수 없게 되자 육군 참모총장에게 청원하여 1964년 5월 29일 국립서울현충원 54묘역 6판 1659호에 안장하였다.
1976년에 예편한 황규만 장군(예비역 준장)은 직장생활 속에서도 김 소위의 신원 확인을 위해 노력하던 중 1990년 우연히 만난 갑종 1기 출신 예비역 대령을 통해 동기 명부를 입수하고 수소문 끝에 김 소위의 신원을 파악하여 가족까지 찾게 되었다. 육군 소위 김수영(金壽泳)은 갑종 1기생으로 강원도 춘천시에 아들 김종태 등 가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국립서울현충원은 김 소위의 신원이 확인되었으나 전쟁의 아픔과 황규만 장군의 전우애를 후대에 길이 계승하는 역사의 산물로 남겨 두기 위해 이름 없는 묘비로 그대로 두고 추모비에만 이름을 새겨 두었다.
황규만 장군은 6ㆍ25전쟁 70주년이 되는 2020년 6월에 사망하였고 54번 묘역 김 소위 묘비 옆에 나란히 안장(1649호)되었다. 한 번의 전우가 영원한 전우가 되는 순간이었다.
종군기자 백광남의 묘 (51번 묘역)
1960년 4월 동아일보에 입사 1966년 10월 14일 월남전을 취재하기 위해 고국을 떠났던 백광남 기자는 1966년 11월 28일 월남 디안에서 국군 비둘기부대를 방문 취재하고 수도 사이곤(현 호치민시)을 향하여 모터사이클로 단신 귀환도중 적군 출몰이 심한 작전지구에서 순직하였는데 한국인 기자로는 최초이고 유일한 순직이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전장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생생한 전황 보도를 위한 취재활동을 하다 사망하여 기자정신이 투철한 언론인으로 귀감이 되고 있다.
유해는 1966년 12월 5일 동아일보사장으로 안장식을 치른 후 제 51묘역에 안장되었다.
육탄 10용사 (6번 묘역)
'육탄 10용사'는 6·25전쟁 발발 이전인 1949년 5월 4일 북한군에 불법 점령당한 개성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는 전투에서 포탄을 품에 안은 채 적의 진지로 뛰어드는 육탄공격으로 적 중화기진지를 파괴하고 장렬하게 전사한 10용사를 일컫는다.
불법 점령당한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육탄공격이었다. 김종훈 소위의 1소대원 전원이 자원하기에 그 가운데 9명의 용사를 선발하여 5월 4일 낮 12시를 기해 서부덕 이등상사를 공격대장으로 하여 김종해, 윤승원, 이희복, 박평서, 황금재, 양용순, 윤옥춘, 오제룡 등 9명의 용사가 폭탄을 품에 안고 적의 중화기 진지에 뛰어들어 이를 파괴하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또 이에 앞서 12시경에 단독으로 적의 중화기 진지를 파괴하려고 돌진하다 전사한 중화기소대 분대장 박창근 하사까지 포함하여 '육탄10용사'라 부르고 있다.
육탄 10용사는 국립서울현충원 6번 묘역 제일 앞줄에 안장되어 있다.
육군하사 이상득의 묘 (26번 묘역)
1967년 3월 8일 백마 28연대가 월남 투이호아 지역에서 오작교 1호 작전을 전개할 때 11중대 최초 목표인 “락미” 마을을 탐색, 적을 색출 소탕하던 중 3소대의 우측으로 진출하던 2분대는 나무숲에 둘러싸인 독립가옥을 수색 할 때 가옥지하에 설치된 10명 정도 수용이 가능한 토관을 발견하고 분대장 이하 4명이 진입하여 수색하던 중, 선두로 들어간 분대장 이상득 병장은 아군을 향하여 수류탄을 투척하는 베트공을 목격하였으나 분대원들이 밖으로 뛰어나가 수류탄을 피하거나 수류탄을 되받아 투척할 여유가 없는 긴박한 순간임을 판단하고, 이병장은 “수류탄이다”라고 소리치면서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3명의 생명을 구하고 장렬하게 산화하였다.
전우애의 귀감이 된 이상득 병장은 하사로 추서되어 제26묘역(708호)묘에 안장되어 있다.
해병상사 양병수의 묘 (6번 묘역)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수도 서울을 되찾은 1950년 9월 28일 수복 당시 양병수 상사는 적 잔당의 총탄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중앙청 청사에 제일 먼저 태극기를 게양하는 군인의 용맹을 떨쳐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되었다.
1979년 7월 3일 사망하여 7번 묘역 1-64호(구 서쪽 6호)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