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번호
- 5268
제 21 묘역 소개
- 작성일
- 2018.05.15
- 수정일
- 2022.02.08
- 작성자
- 현충원
- 조회수
- 1448
개요 및 안장 현황
제21묘역은 6․25전쟁, 베트남전, 해군 당포함에서 전사하신 분들을 모시기 위해 조성한 묘역으로 총 1,587위가 안장되어 계신 묘역이다.
연도 | 계 | '50년 이전 | 6・25전쟁중 | '54~'59 | ‘60~’69 | ‘70~’79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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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87 | 1 | 720 | 151 | 591 | 85 | 39 |
안장 | 1,587 | - | - | 873 | 612 | 99 | 3 |
안장배경
파주 장단(사천강)지구전투
1952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전초진지 쟁탈전이 전개되고 있을 때, 판문점으로부터 임진강 하구까지의 11Km에 달하는 주저항선을 방어하던 국군 해병1연대(미 제1해병사단의 좌 일선연대)가 주저항선 전방의 8개 전초진지에서 중공군 2개 사단(제194/제195사단)과 대결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해병1연대는 인해전술을 구사하는 중공군의 파상공격으로 말미암아 8개 전초 가운데 원거리 전초(주저항선 전방 3Km) 4개를 상실한 후 근거리 전초(주저항선 전방 1Km) 4개를 확보하기 위하여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해 놓고 있던 중 이들의 재공격을 받게 되자 진내사격을 유도하여 막대한 타격을 가하고 이들을 격퇴하였다.
해병대는 이 전투로 전사 776명, 부상 1938명 손실을 보았으며 중공군은 14,017명, 부상 11,011명, 포로 42명이라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홍시욱 이등병조(現하사)[21묘역 3판 1448호]
1950년 9월 UN군의 인천상륙작전 해군 첩보부대 요원으로서 인민군 점령하에 있는 인천, 서울지역으로 잠입하여 인민군의 병력, 장비, 경계상태, 지뢰부설 여부 등 중요한 군사첩보를 수집하여 우리 해군본부와 미 극동군사령부에 첩보를 제공하여 인천상륙작전에 크게 공헌했으며 인천상륙작전 개시 하루 전 북한군 1개 대대와 교전하다 포로로 잡힐 경우 기밀누설을 염려하여 자결했다. 해군은 유도탄 고속함(PKG) 11번 함을 홍시욱함으로 명명했다.
강남주 중사[21묘역 5판 688호] 등 7위
1951년 12월 26일 적이 기뢰 및 지뢰 등을 원산항 부근으로 운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704함장(이태영 중령)은 항해가 불가능한 해상날씨에도 불구하고 원산항 부근 해역으로 출동하여 맹렬한 함포사격을 가해 적이 추가 기뢰를 부설하지 못하도록 분쇄하고 외해로 나오던 중 칠흙같은 어둠과 최악의 기상상태로 인하여 방향을 잃고 적이 부설해둔 기뢰에 의해 침몰, 함장인 이 소령과 전 승조원 57명이 장렬히 전사했다.
당포함 사건
불운의 당포함 사건은 79명의 승조원 중 해군 박태만 대위 등 39명이 전사한 사건으로서 66. 12. 28일 당포함은 동북 최북단 NLL 근해에서 명태떼를 쫓아 북쪽으로 이동하며 조업 중인 명태잡이 어선을 보호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어로선단을 보호하던 중 '67. 1. 19일 무장한 2척의 북한 함정을 발견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전투준비를 하고 있던 중 2척의 PBL북한경비정이 갑작스럽게 NLL을 침범하여 우리어선을 납북하려 하자 우리 어선들을 보호하기 위해 당포함이 북한 함정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북한경비정이 122mm 육상해안포대 280여발의 기습 포격을 감행하여 우리 어로선단을 보호하면서 함포 170여발을 응사하는 등 교전을 했으나 북한의 육상해안포의 집중사격을 받은 당포함은 애석하게도 39명의 전우들과 함께 침몰했다.
비록 당포함은 침몰하였으나 승조원들의 값진 희생으로 민간인 사상자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이는 국민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초계와 같이 버리고 산화한 대한민국 해군용사들의 용맹을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67. 1. 20일 해군에서는 당포함과 함께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동해 경비함대 기함 함상에서 당시 해군참모총장을 비롯하여 많은 장병들이 참석한 가운데 합동 진혼식을 개최하여 그 넋을 위로하고 '69. 1. 27일 해군장으로 이곳 국립서울현충원 21번 묘역(39위)과 19번 묘역(4위)에 안장하였다. 또한 이들 전사자 모두는 1계급 특진과 충무무공훈장 및 화랑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매년 5월말 유족과 생존장병, 추모사업회 등 150여명이 추도식을 거행함으로써 이분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장익철 중사[21묘역 2판 1537호]
해군 YTL 사건은 1974년 2월 22일 오전 11시 8분경 경상남도 통영시 통영항 남쪽 700m 해상에서 해군․해경 신병과 기간사병 311명, 승무원 5명 등 316명이 탄 해군 YTL(120톤 예인선)이 전복 침몰하여 총 159명이 순직한 참사이다.
당시 사고 해역에는 궂은 날씨에 비와 초당 최대풍속 18m 강풍이 불어 파도가 높았고, 기온마저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최악의 기상상황으로 해군의 시조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인 한산도 제승당과 충렬사를 참배하고 모함인 LST-815 ‘북한함’으로 귀함하던 중 갑자기 몰아닥친 파도를 피하기 위해 급선회를 시도하다 예인선이 균형을 잃고 전복, 침몰한 사건이다.
해군은 사고 즉시 함정 4척을 급파하고 피항하던 어선 10여척을 동원해 함께 구조작업에 나섰으나 승무원 3명, 기간사병 3명, 신병 153명은 끝내 구조하지 못했다.
침몰 사건으로 순직한 장병들 155명은 사건 발생 다음 달인 3월 3일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안장되던 날 오후 실종자 4명 중 3명의 시신이 인양되어 함께 안장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1명(김홍두 해군일병)은 2개월 뒤인 5월 25일에야 안장될 수 있었다.
전체 인원의 절반이 넘는 젊은 군인들이 차디찬 겨울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이 사건은 전시가 아닌 평시 해난사고 중 세계 해군 사상 가장 많은 인명 손실을 가져온 대참사로 꼽히고 있다. YTL 사건 순직자 총 159위 중 157위는 56묘역 1판(1846호〜2002호)에 모두 안장되어 있으며, 나머지 1위는 19묘역 4판 144호에 안장되어 있다.
추모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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