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서울현충원 현충탑 내부에 설치된 위패봉안관은 총 면적 693㎡으로, 벽면 369.6㎡, 높이 4.1m의 구조로 되어 있다. 영현승천상의 아래 지하에는 면적 148.5㎡ 규모의 무명용사 봉안실이 마련되어 있다.
현충탑 동문 밖에는 높이 3m, 폭 2.6m의 크기로 부부위패판을 설치하여 유해를 찾지 못한 안장 대상자와 그 배우자를 함께 봉안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위패봉안관 중앙에는 영현승천상이 세워져 있으며, 천장에는 영령들의 안식과 승천을 기리는 천국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그리고 내부 모서리에는 수호신상인 천신, 지신, 해신, 산신, 목신, 화신을 세워 6방위에서 호국영령을 수호하는 의미를 담았다.
위패봉안관에 모셔진 분들은 대부분 6 · 25전쟁 당시 전사자로 유골이나 시신을 찾을 수 없는 분들이며, 총 10만 3천여 위 중 위패봉안관 내부에 10만 1,658위가 모셔져 있고, 현충탑 동문 쪽에 설치(2009년 4월)된 부부위패판에 1,545위를 봉안하고 있다. 또한 영현승천상 지하 무명용사 봉안실에는 국군 전사자이지만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무명용사가 2021년 8월 말 기준 5,870위의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2018년 2월부터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제5조 3항의 개정으로 위패로 봉안된 사람의 배우자도 함께 위패봉안 또는 유골의 형태로(배우자의 유골이 있을 경우) 안장이 가능하며 598위가 충혼당에 안치되어 있다. (2021년 4월 말 기준)
위패봉안관 입구
부부 위패 봉안
부부 위패 봉안
홍재근 일병, 김용식 일병
1950. 8. 24. 수도사단 17연대 3대대는 낙동강 전선에서 부대를 재편성하여 역습에 임하였다.
9중대 3소대 소총수인 홍재근, 김용식 일병은 신병이지만 돌격작전의 선봉에서 적진으로 돌진, 정상부근 자동화기 진지까지 포복하여 접근하였다. 맹호처럼 순식간에 진지로 뛰어들어 자동화기 사수와 군관을 대검으로 협공, 김용식 일병은 군관을 덮치며 우측 대퇴부를 찌르고 홍재근 일병은 사수와 부사수의 옆구리를 찌르는 등 군관을 포함한 인민군 15명을 생포하여 임무를 완수하는 군인정신의 귀감이 되었다.
홍재근 일병은 위패봉안관 3판 4면 47호에 봉안되어 있다.
김풍익 중령
1950. 6. 26. 포병학교 교도대대는 2사단 직접지원 대대로 명령을 받고 전방작전에 배치되었다. 대대장 김풍익 소령은 의정부 북방 4㎞ 지점인 금오리에 장세풍 대위의 2포대를 포진시키고 적전차를 저지하기 위해 집중포격을 가하였으나 적전차의 전진을 막지 못하였다.
적전차의 격파는 “조준사격”이라고 판단, 적전차와 정면대결을 결심 2포대 6번 포를 전진 배치하였다.
적의 선두 전차가 모퉁이를 돌아 50m 전방으로 다가서자 직접 조준 사격으로 제1탄을 발사 선두 전차를 파괴 후 제2탄을 장진하던 찰나 뒤에 따르던 적전차의 직격탄에 김풍익 소령 이하 전 반원이 장렬하게 산화하여, 죽음으로 임무를 완수하는 군인정신의 귀감이 되었으며 위패봉안관 48판 1면 212호 위패로 봉안되어 있다.
심일 소령
6사단 7연대 대전차포중대 2소대장 심일 소위는 1950. 6. 25. 춘천 북쪽 4㎞ 지점인 옥산포에서 57㎜ 대전차포 2문으로 사격, 선두차에 3발을 명중시켰으나 전차는 끄떡없이 남진하였다.
이에 적전차의 측면 공격을 결심한 심일 소위는 사격지휘는 선임하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특공조 5명을 조직, 화염병폭약을 적전차의 길목에 매설하였다. 적전차 남하시 선임하사는 57㎜ 대전차포로 선두와 두 번째 전차를 명중시키고 매복중이던 심일 소위는 2개조로 폭약을 투척하여 적전차를 격파시켰다. 심일 소위의 용감한 특공작전으로 6사단이 춘천을 2일간 방어할 수 있었으며 적전차에 대한 공포심을 제거하고 육탄으로 공격, 파괴하는 본보기가 되었다.
1951. 1. 26. 전사하여 위패봉안관 47판 3면 29호에 위패로 봉안되어 있다.